하수구막힘 물이 되밀려 올라오는 이유, 훈정동 묘동 봉익동 돈의동 배수 문제새 창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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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야생의불씨60 작성일26-10-09 05:59 조회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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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바는 떠날 터이다나는 '거기'로 간다. 그녀는 '그곳'을 떠나려 한다. 훈자(Hunza)의 소녀 아리바 (Ariba), 그녀와 나는 거기서 스쳐간다. 만년 빙하, 그 부스러기 얼음 조각이 봄볕에 녹아 미끄러 내리 듯. 잠시 있다가 자취없이 사라져 버리는 만남. 훈자는 파키스탄의 북쪽 꼭대기… 히말라야, 카라코룸, 힌두쿠시 세 산맥이 서로 닿을 듯 모이는 곳. 그 사이 황량한 허공이 훈자 계곡이다. 옛 실크로드의 한 갈래가 이 계곡을 따라 간다. 지금은 카라코룸 하이웨이, 중국의 자본과 기술로 포장된 2차선 도로가 되어있다. Baltit 아리바를 만난 곳은 카림아바드, 잃어버린 훈자 왕국의 도읍지이다. 1974년 파키스탄에 병합되기 전 훈자는 1000년을 버틴 독립 왕국. 발티트 (Baltit) 성채로 오르는 언덕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유럽인의 골상에 동양인의 살색, 아직 봄앓이에 눈 뜨지 않은 해 맑은 얼굴, 그 얼굴의 반의 반은 깊은 갈색 눈. “사진 찍어 주세요” 떠듬한 영어로 그녀가 말한다. 굳이 나하고 같이 찍자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들도 부른다. 얼떨결에 아리바 가족 사진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사진기는 내 사진기. 그녀와 그녀의 동생들은 아직도 내 사진 저장고에 갇혀 있다. 아리바와의 두 번째 만남은 발티트에서 내려오는 길 노변 식당에서다. 갓 구운 난(Nan)을 먹고 있는 우리 일행을 보고 아리바가 온다. 자기 식구들이 먹는 훈자의 음식 한 덩어리를 멋쩍게 주고 간다. 한국의 호박범벅 비슷한 그녀의 선물을 나도 어정쩡하게 받는다. 알티트 (Altit) 성채 앞 바위 위에서 아리바를 세 번째 만난다. Altit알티트와 발티트, 둘 다 훈자의 왕성이다.알티트가 먼저다. 서기 11세기경 훈자 계곡에 들어온 선주민이 왕성을 세웠다. 당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훈자에 들어온 사람들은 백인 훈족이라는 주장도 있다. 알렉산더 대왕 군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훈자 주민들 중에는 눈이 파란 백인들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지금도 이 지방에서 쓰는 언어는 주위의 다른 말과 연관 관계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알티트의 두 면은 90도 각도의 절벽이다. 아래로 훈자 강이 큰 구렁이 몸통 만하게 보인다. 훈자의 왕 미르(Mir)는 반대자들을 왕궁에 초대한 후에 알티트에서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왕국은 분열한다. 14세기에 왕위를 두고 형과 동생이 싸운다. 형이 알티트를 버리고 옆 동네에 발티트를 세운다. 발티트 궁의 세력이 더 커서 동생을 죽이고 다시 한 나라로 남는다. 발티트에서 알티트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황톳길, 냇물도 있고, 다리도 있고… 1960년대 한국의 시골 길 같다. 알티트 성채 앞, 아리바가 반갑게 웃는다. 또 사진을 찍어 달랜다. 그녀의 손에 들어갈 수 없는 사진. 아리바는 왜 사진 찍히기를 원했을까? 그녀의 눈 속에 답이 보인다.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남들이 이상향 ‘샹그릴라'라고 찾아오는 이 곳, 훈자 땅도 그녀에게는 속박이다. 아리바는 떠날 것이다.60년 전에 나도 그랬다.(김지영 미국 변호사 / 2019.12.31)Hunza 작은 교회가 완성한 세상의 끝, 카즈벡 산(山) ‘먼저 생각하는 신(神)’ 프로메테우스와 ‘나중에 생각하는 신’ 에피메테우스 형제는 지상에 내려와 동물과 인간을 창조했다. 개념 없는 아우 신이 동물들에게 갖가지 능력을 줘버린 뒤, 형 신은 인간에게 줄 남은 능력이 없어 고민하다 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신의 전유물인 불을 전해준다. 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세상 끝의 절벽에 쇠사슬로 묶고 매일 독수리를 보내 간을 쪼아먹는 영원한 형벌을 내렸다. 그 세상의 끝이란 캅카스산맥 중 조지아 땅인 카즈벡산이다. 해발 5047m의 험준한 만년설 봉우리가 병풍같이 펼쳐져 신화시대에는 이 산 너머로 타르타로스라는 지옥이 있다고 믿었다. 조지아인들은 태초부터 전래한 그들의 아미란 신화가 변용되어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된 것이며 그 무대인 카즈벡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믿는다. 이 산을 배경으로 2170m의 중간 봉우리에 게르게티 삼위일체 교회가 홀로 우뚝 서 있다. 14세기에 건설된 200㎡ 남짓의 작은 교회로, 원뿔형 돔을 가진 그리스십자형 본당과 또 하나의 원뿔 돔 종탑이 전부다. 이 산의 거친 돌을 잘라 벽을 쌓았고 문과 창 언저리만 살짝 조각한 매우 소박한 교회다. 좁고 위아래로 긴 톨로베이트 창으로 스며든 빛이 어두운 내부의 성스러운 벽화, 이콘들을 신비롭게 비춘다. 이 교회는 전란 중에 최고 국보인 ‘니노의 십자가’를 보관할 정도로 국가적 피난처였다. 정교회의 나라 조지아는 큰 교회와 수도원들이 곳곳에 있지만 게르게티 교회가 가장 상징적인 곳이다. 붉은 화산암의 종탑과 회색 응회암의 본당은 그 강렬한 윤곽과 색채가 ‘얼음산’ 카즈벡의 흰색 절벽과 대비를 이룬다.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를 풀어 준 이후, 게르게티 교회는 이 산의 지킴이가 되었다. 대자연이 그린 풍경의 밑그림에 건축은 의미와 역사를 부여해 인문학적 풍경으로 확대한다. 게르게티 교회는 비록 작고 소박하나 그 역할은 카즈벡산만큼 거대하다. -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최근 다녀온 코카서스 산맥 일대 여행을 통해 나이의 변곡점을 실감하면서도 설렘과 배움을 주는 ‘사서 하는 고생’ 쪽을 이어가리라 다짐했다. - 고혜련 제공흙을 닮은 사람같은 크기의 그릇을 두 개 준비한다. 한 그릇엔 투명한 물을 담고, 다른 한 그릇엔 흙을 담는다. 그리고 같은 양의 빨간 물감을 떨어뜨린다. 물은 빨갛게 오염되고 흙은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물은 과거에 얽매이고, 흙은 과거를 제쳐둔 채로 무던히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두 차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상황은 '좋은 평가'를 받을 때와 '안 좋은 평가'를 받을 때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아니듯 안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안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수학 문제지에 받은 '×'와 예술 작품에 받은 '×'도 다르다. 이 지겹고 정답이 없는 평가를 살아가는 내내 받아야 하는 건 인간의 숙명일까. '좋은 평가'는 그저 좋은 것으로 그치지만, '안 좋은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뉜다. 납득이 가는 평가와 단지 감정이 격양돼 인신공격에만 집중된 평가. 인신공격에만 집중된 평가는 기억에서 쉽게 잊히지 않는다. 곤히 자려고 누우면 꼭 내 옆으로 와서 함께 드러눕는다. 사실 나는 그다지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인생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아버린 사람이다. 물의 성질보다 흙의 성질을 갖춘 사람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상처와 맞서야 했다. 가끔 선배들이 해주는 나에 대한 안 좋은 평가는 따끔한 조언이 되어 나를 납득시킨다. 오염이 아닌 마른 흙에 물기가 되어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만약 내가 흙이 아닌 물에 그쳤다면 새까맣게 오염됐을 테다. 하지만 흙이 되었기에 좋은 방향으로 상황이 흐른 것이다. 이렇듯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주변에 흐르는 모든 언어를 즐길 수 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적당히 착각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남의 눈치 보며 두드린 곳에는 미련만 있다.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믿고 나아간 곳에 성공이 있다. (이원하 시인)지 혜새벽이면 동이 트는 것을 바라봅니다. 지평선도 아니고 수평선도 아니지만 아파트 숲 뒤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도 여간 ‘장엄’하지를 않습니다. 다행히 새벽잠이 없는데다 남으로 창이 나 있어 베란다에 앉아 있으면 그런 일출을 마음껏 ‘감동’할 수 있습니다. 때로 일몰을 뭉클해 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해돋이를 맞이하는 경우에 비하면 별로 잦지 않습니다. 박두진 선생의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해가 ‘어둠을 살라먹고’ 되살아나는 황홀한 신비를 차마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 감동이 가슴 가득히 차고 넘치면 하루가 마냥 자신이 있습니다. 구름이 끼어 해를 볼 수 없는 날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녘의 밝은 때문에 해가 솟아오른다는 사실은 결코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날마다 해맞이를 하다 보면 해는 한 번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해가 뜨지 않는 날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이 언짢으실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해야 당연히 뜨는 것인데 굳이 그것을 ‘늘 해맞이를 하다보면 해가 반드시 뜨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다니, 그럼 해가 뜨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단 말인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그런데 정말이지 매일 해맞이를 하다보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음, 오늘도 ’마침내‘ 해가 떴구나!라든지 오늘도 ’여전히‘ 해가 뜨는구나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잊어도 상관없는 당연한 ‘존재’로 해가 있어 그 현존을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맞아야 할 ‘사건’으로 해의 실존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분명하게 ‘일출은 만나야하는 사건이고, 내 삶은 그 사건과의 만남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늘 그렇듯 새벽에 베란다에 나갔습니다. 서서히 동이 트는 듯 했습니다. 검은 색깔이 가시면서 사물의 윤곽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황홀한 해돋이가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저는 동쪽을 향해 예의 감동적인 사건을 만날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붉은색이 짙은 잿빛으로 흘러들려는 찰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순간 제가 왜 그랬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문득 서쪽을 바라본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문득 동쪽을 등진 것이었는데, 제 시선이 가 닿는 저 먼 끝에 있는 산등성이 위의 아파트들의 머리끝들이 흰빛으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새벽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밝음은 몸뚱이 아래로 더 길게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아파트의 발은 짙은 잿빛 어둠속에 빠져 있었지만 그것도 그렇게 느낀 순간뿐, 차츰 흰벽과 녹색 나무들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어둠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만물이 자신을 드러내면서 환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이 온 것입니다. 밤이 가고, 해가 뜨고, 낮이 시작된 것입니다. 새 삶이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밝아오는 누리를 바라보면서 저는 꽤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도록 새벽의 ‘바라봄’을 지탱한 것은 처음입니다. 동쪽을 바라볼 때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해가 솟으면, 그야말로 ‘이글이글한’ 태양이 떠오르면,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눈이 부셔 제 시선을 태양을 향해 더 이상 머물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일출을 하나의 사건으로 확인 하는 일 뿐,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찬란한 햇빛을 응시하는 속에서 내 눈에 드러난 ‘현실’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해를 눈감고 돌아서서 서둘러 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서쪽을 바라보는 새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눈이 부시지 않았습니다. 사물이, 온 누리가, 스스로 자신의 윤곽을, 자신의 실재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출의 시각에 동쪽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 그것은 근원적인 긍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서쪽에는 현실이 있었습니다. 제가 걸어 들어가야 할 세상이 또렷하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돋이는 동쪽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서쪽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 사건’이라고 해야 더 바른 서술일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해가 뜰 적에는 서쪽을 바라보십시오. 서서히 밝아오는 현실을 투시하십시오. 그리고 뚜벅뚜벅 당신의 오늘을 내디디십시오. 해가 뜨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아직 동쪽을 바라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자칫 눈부신 황홀 속에서 당신은 밝아오는 누리를 잊으실 수 있습니다. 동쪽에의 ‘신앙’이 있으시다면, 이제 해가 솟을 즈음에는 서쪽을 바라보십시오.”라고. (정진홍- '해가 뜰 적에는'-한국의 명수필 중에서)문 앞에서나쓰메 소세키(1867∼1916)라고 하면 20세기 초반 근대문학의 태동기에 근대적인 인간을 문학적으로 그려낸 대표적인 소설가로 평가받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사소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바로 눈앞에 있는 문을 열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 관해서 말이다. ‘산시로’ ‘그 후’ ‘문’으로 묶이는 소세키의 ‘전기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1910년에 발표된 ‘문’(송태욱 옮김·현암사)에 등장하는 소스케라는 인물이다. 도쿄의 관청에서 근무하는 소스케는 아내 오요네와 함께 아이 없이 살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일상을 꾸리고 있다. 잔잔한 물결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두 사람의 일상은 그 무엇에도 적극적이지 않고 어떠한 욕구도 회피해버리고 마는 소스케의 내면에서 비롯한다. 유산과 남동생의 학비 때문에 숙부와 갈등을 겪고 있지만, 소스케는 일처리를 한없이 미루기만 한다. 물려받은 병풍을 고물상에게 한참 밑지고 팔아도, 남동생이 자신을 무시하는 듯 불만을 내비쳐도, 소스케는 자기에게 주어진 마땅한 인생이라는 듯 가만히 곱씹을 뿐 어떤 형태로도 괴롭거나 불편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소설의 후반부에서야 비로소 밝혀지는 “과거로부터 질질 끌고 온 운명” 때문에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해야 할 일은 끝없이 연기되며, 매듭지어지는 사건은 없다. 이 소설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장인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 앞에서 소스케는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채로 끝나는지도 모른다. 참선하기 위해 들어간 가마쿠라의 절에서도 그는 답을 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카프카의 ‘성’(1926년)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마다 수화기에서 “언제라도 절대 들어올 수 없어”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던 이방인 K처럼 말이다. 소스케가 도저히 열고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문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어쩌면 답은 문을 열고 너머로 건너가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두드리다가 포기하고 돌아섰을 때 자신이 매일 살아가던 일상의 문턱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정도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내 오요네와의 폐쇄적인 생활은 몹시 비극적인 색채가 짙으면서도 희미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다. 비극과 권태와 사랑이 뒤섞인 두 사람의 세계는 “두 사람의 정신을 구성하는 신경계는 최후의 섬유에 이르기까지 서로 껴안고 있었다”고 표현된다. “길은 가까운 데 있는데 왜 먼 데서 구하느냐(道在爾而求諸遠)”는 맹자 이루장의 철학적 구절을 문학적 장면으로 옮기면,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그려진 두 사람의 고요하고 단조로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무심하게 반복되는 이 일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아영 문학평론가)칙천거사: 나쓰메 소세키 道法自然(도법자연) :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노자 ‘도덕경’의 말씀이다. 천지 만유(萬有)에 앞서 자연의 도가 있었다. 도에서 천지가 생겼고 만물이 생겼다. “사람은 땅을 법(法)하며, 땅은 하늘을 법한다. 하늘은 도를 법하고 도는 자연을 법한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가 그것이다.도가 자연을 법한다는 것은 자연과 일치해 자연 그대로가 되는 것이다. 도 본연의 모습은 자연이다. 적막(寂寞)함이여, 요원(寥遠)함이여, 적막하고도 쓸쓸하다. 도야말로 천지 만유를 낳은 근본이며, 만유를 낳은 어머니인 것이다. 내 그 이름을 모르니, 이를 가로되 ‘도(道)’라 하고 굳이 이를 이름하면 ‘대(大)’라 한다. 대를 가로되 ‘서(逝)’라 하고, 서를 가로되 ‘원(遠)’이라 하고 원을 가로되 ‘반(反)’이라 한다.간다(逝)는 것은 어디를 가도 막히지 않는다는 뜻이고, 멀다(遠)는 것은 무한한 공간의 발전성이니 원심력을 뜻하며 동시에 무한한 구심력을 갖춘다. 일체는 다 그 원인으로 되돌아간다(反). 그러므로 우주 사이에서 큰 것을 든다면 도가 가장 크며, 그다음은 하늘이요, 그다음은 땅, 도를 체득한 성인(王)도 크다. 모든 것은 자연의 도에 합치하며 그것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노자는 이같이 풀이했다. ‘하늘을 본받고 나를 버린다’는 ‘칙천거사(則天去私)’.몇 해 전 구마모토(熊本) 문학관에서 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의 친필 족자가 떠오른다. 그는 죽기 얼마 전, “나는 쉰이 되어 비로소 내가 향해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어리석은 자입니다”라며 어느 스님의 연하장에 써 보냈다고 한다. 집행이 유예된 사형수들의 아집을 다룬 작품 ‘명암’에 와서 나쓰메는 절대 하늘의 길인 ‘칙천거사’를 깨달았노라고 술회했다. ‘도법자연’, 나는 그런 그를 다시 생각한다. 두 마음평소 ‘죽음이 삶보다 고귀하다’고 믿고 있던 나의 희망과 조언은, 결국 이 불유쾌로 가득 찬 삶이라는 것을 초월할 수 없었다. (…)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다.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수필집 ‘유리문 안에서’의 글이다. 연하 청년과 연애에 빠져 그를 자살케 한 과거를 가진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자살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평소 죽음을 삶보다 더 편안한 것이라고 믿던 소세키가 그녀에게 불쑥 던진 말은 “죽지 말고 살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결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그런 두 마음을 생각하고 있다.”흑백논리에 빠지지 않고 양쪽 다 고려해보는 신중한 그의 태도가 침착한 용모에 겹쳐서 떠올랐다. 고령의 양친에게서 5남 3녀의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어느 고물상의 수양아들로 보내졌지만, 곧 되돌아왔고, 두 살 때 시오바라 쇼노스케의 양자로 보내졌으나 양부모의 불화로 매일 밤잠을 설쳐야 하는 환경에서 다시 본가로 돌아온 것은 아홉 살 때였다.양부는 14년 전 겐조(소세키)가 쓴 증서를 갖고 찾아와 복적(復籍)의 대가로 금품을 요구했다. 소세키는 그때의 아픔을 소설 ‘미치쿠사(道草)’에서 털어놓았다. “뭐, 생가에 맡겨뒀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 사이 겐조가 커서 일할 나이쯤 되면 그땐 소송을 해서라도 뺏어오면 돼.”친부에게 그가 허드레 물건 취급을 받았다면, 양부에게는 당장 무슨 도움을 받으려는 이용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소세키는 겐조의 눈을 통해 양부는 물론 자신마저 ‘신의 눈’으로 물었을 때 양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반문한다. “만약 신의 눈으로 내 일생을 본다면 이 욕심 덩어리 노인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쓰고 있다.(48장) 그는 늘 자기를 성찰하고 객관화하는 두 개의 눈을 가슴에 지닌 작가였다. (맹난자 수필가) 세상은 울기에는 너무 우습고 웃기엔 추악하다영국 유학을 다녀온 나쓰메 소세키가 도쿄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1900년대 초반 어느 날. 한 학생이 'I love you'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로 번역하자 소세키는 '달이 아름답네요'정도로 번역하는 게 좋겠다고 수정해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이었으니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이 일본인들 정서에 안 맞던 모양.어쨌든 그 이후 '달이 아름답네요'라는 말은 하나의 일상적인 숙어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은유할 때 지금도 종종 등장한다.소세키는 일본 근현대문학의 아버지다.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마음'등에서 일본 사소설의 전통은 시작됐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됐던 2000년. 일본 아사히신문이 지난 1000년간 일본 최고 문인이 누구인지를 묻는 설문을 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는 물론 대단한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도 소세키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일본인에게 개화된 언어를 가져다준 사람이다. 한문체가 대세였던 일본 문학에 언문일치 일본어를 적용시켰고, 수많은 영어 명사를 일본어로 옮겨 서구 문물이 일본인들 머릿속에서 개념화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그가 영어에서 가져와 최초로 규정한 단어들은 지금 한국에서도 종종 사용한다. 신진대사, 반사, 무의식, 가치, 전력, 낭만 같은 말들이다.이런 일화도 있다. 일본인이 흔히 쓰는 1000엔짜리 지폐의 등장인물은 원래 이토 히로부미였다. 당연히 일본 침략에 의해 피해를 본 당사국들이 반발했고 일본 정부는 교체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쓸 만한 인물이 없었다. 고대 인물은 이미 다른 화페에 들어가 있었고, 근현대 인물 중에는 군국주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때 선택된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였다. 그는 군국주의가 싹트고 몸집을 키우던 바로 그 시절 글을 쓰고 강단에 섰지만 군국주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된 건 소세키에게 신념 같은 게 있어서라기보다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었다.소세키는 사회적인 사람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타고난 회의주의자였고 소심했으며 고독했다. 최근 출간된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일다 펴냄)을 보니 그의 성향이 확연히 드러나는 구절이 흔히 발견된다. 그는 마흔 살 무렵 이런 편지를 쓴다.좋아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 풀과 나무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특히 봄볕은 더할 나위 없이 좋군요. 저는 그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습니다.소세키는 신경쇠약과 심한 위궤양으로 죽기 전 세상은 울기에는 너무 우스꽝스럽고 웃기에는 너무 추악한 곳이라는 말을 남긴다. 죽기 직전 남긴 또 다른 편지는 평생 고독했던 한 남자의 절명시처럼 읽힌다.가을이건만. 읽다 남은 이 책을 마저 읽을 수 있을지.(허연 매경 문화선임기자)‘위궤양·위암 의료 정책을 바꾼‘일본의 셰익스피어’1915년에 발간된 나쓰메 소세키 전집에 실린 소세키의 모습.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 인상적이다.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 작품으로는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당대 영국 유학파로, 수필·한시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메이지 시대 대문호로 꼽히며, 소세키의 초상은 일본 지폐 천엔권에 모셔지기도 했다. 그가 1905년에 발표한 ;는 말하는 이가 고양이로, 어느 새끼 고양이가 학교 영어 교사 집에 들어가 빌붙은 후, 고양이로서 겪는 일과 교사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저렇게 매일 빈둥거리며 지내면서도 선생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고양이라고 하지 못하란 법도 없겠다”라며 너스레 떨면서 세상에 대한 풍자를 늘어놨다. ;을 쓴 조성관 작가는 “소세키는 평생 위궤양에 시달렸고, 수선사라는 절에 휴양 갔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며 “극심한 위경련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외쳤다”고 말했다. 소세키는 결국 위궤양 출혈로 향년 48세에 세상을 뜬다. 그의 죽음은 현대 일본의 의료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위궤양의 주된 원인은 위장에 살며 위산을 먹고 사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이다. 파일로리균이 위점막을 헐게 하여 위암 발생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균 감염 시 10일 정도의 항생제 제균 치료를 하면, 위궤양·위암 예방 효과를 얻는다. 일본에서는 이를 건강보험으로 광범위하게 지원해주는데, 그 당위성을 말할 때마다 소세키의 위궤양 죽음이 거론된다. 소세키가 현대에서 항생제 치료를 받았다면, 오래 살면서 많은 작품을 더 남겼을 것이라는 얘기다. 국내에서도 위장병 증세가 있고, 균 감염이 있으면 제균 치료가 건강보험으로 지원된다. 소세키의 삶은 짧았지만, 죽음은 길게 이어지며 후대를 살리고 있다. - 김철중 조선일보 기자이희용의 연필 그림 연필로 표현한 조선 도공의 혼과 미 :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하면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다. 이희용의 연필 그림을 보고서 하는 말이다. 선인(仙人)들이 입는 옷에는 바느질 흔적이 없다는 말로, 시문 등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다는 뜻 그대로다. 손을 타지 않은 듯, 침묵의 혼을 정갈하게 담은 그림이다. 입문과정에서 연필 드로잉을 많이 하지만, 이토록 깊이 있는 표현이 가능한 재료인지는 몰랐다. 연필의 흔적 따위는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내공이 실려,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다. 사진은 화면이 확대됨에 따라 입자라도 보이지만 여기서는 도무지 재료와 기교의 티를 내지 않는다. 가공할 해상도를 자랑하는 미디어의 시대를 등지고 몽당연필로 그리는 그림. 감동의 요체는 기술이 아니라 내면의 문제임을 고한다. 흙에 혼을 불어넣은 도공의 마음을 화면에 담고자 함이다. ‘기교 없는 기교’의 심미적 결정체인 분청사기의 감동이 더 증폭되는 이유일 게다. (이재언 미술평론가)우리 조상의 그릇, 한국의 제기祭器 김상인 작가의 백자로 차려진 제기상탄생의 문(門)을 지나 마침의 문(門)으로서울 홍지동 언덕배기 주택가 안쪽에 자리한 쉼박물관은 독특한 곳이다. 개인 주택 안방으로 쓰던 곳을 개조해 커다란 꽃상여를 전시해 놓았고, 집안 곳곳에는 꼭두를 비롯한 전통 상례용 물품이 그득하다.박기옥 관장은 “삶과 죽음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쉼’이라는 맥락에서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며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삶, 뭘 그리 아옹다옹하며 사느냐”고 말한다. 용수판(龍首板)은 상여 가마에서 관의 윗부분인 보개 앞뒤에 부착하는 반월형의 판인데, 잡신을 물리치고 혼령을 지키는 벽사(僻邪)의 의미가 담겨 있다. 쉼박물관의 용수판 소장 규모는 국내 최대 수준이다. 물고기를 좋아하는 도깨비를 비롯, 용과 호랑이 등 액운을 막기 위한 다채로운 문양과 색채가 현대 설치미술 못잖다. 전시실에서는 놋그릇과 백자 등 다양한 제기들이 전시되어있다. 탄생의 문(門)을 지나 마침의 문(門)으로 / 다양한 용수판들꼭두“옳지 다 됐다. 이제 고운 옷만 입으면 되겠구나.” 조각가 할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 거의 모양을 갖춰 가는 꼭두인형의 귀를 간질였다. “처음 세상에 나가는데 예쁘게 꽃단장을 해야지. 네 이름은 ‘꼭지’ 어떠냐. 널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이 이름이 떠올랐단다.” 꼭두인형 목각 작업실, 한 여자아이가 야트막한 창 밖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인형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할아버지를 지켜본다. “숨이라는 아이인데, 할머니 집에 와 있다더라. 어쩌나 수줍음이 많은지….” 꼭지처럼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숨이는 제 얘기가 나오자 고개를 숙이고 숨어버린다. “꼭지, 꼭지, 꼭지….” 할아버지와 숨이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꼭두인형 꼭지는 가슴이 팔딱팔딱 뛰는 것 같다. 꼭지가 단장을 마친 날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너는 숨이하고 친구 하는 거다. 재밌게 지내거라, 오래오래 정답게.” 숨이는 할아버지가 건네준 꼭지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꼭지는 이제 숨이 앞에 놓인 긴 삶의 길동무가 될 것이다. 이젠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지만, 꽃상여를 장식하는 꼭두인형은 예부터 민초들의 생사 경계 넘는 길을 안내해온 오랜 길동무였다. 알 수 없는 저승길을 노래하고 춤추며 함께 가 주는 든든하고 고마운 존재. 꼭두인형이 있어서, 조상들에게 상여 길은 슬픔 없는 피안으로 가는 축제길이기도 했다. 책 속 페이지를 펼치면 악사 인형이 각양각색 악기를 울리며 흥을 돋우고, 호랑이나 학을 탄 신선들, 재주 넘는 광대들, 소녀·소년 인형들이 춤추는 모습이 펼쳐진다. 작가는 실제 꼭두 조각가의 전시를 본 뒤 작업실을 취재해 이야기를 썼다. 부드러운 선과 우아한 수채화에 우리 전통 색감을 입힌 그림에 마음이 평안해진다. (이태훈 조선일보 기자) 꽃상여, 전남 화순, 1992년 ⓒ김녕만백년보다 긴 하루그들은 최선을 다해 살았고 최선을 다해 알았다세상엔 무수히 많은 책이 있다. 널리 알려진 책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알려지지 않은 책 중에서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다.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는 보석이다. 단 한 편의 소설에 삶과 죽음은 물론 사막과 우주, 사랑과 이별, 이념과 종교 그리고 전설과 현대사가 믿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게 수놓아져 있다.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스탄 출신 작가다. 작가가 활동했던 시절 키르기스스탄이 옛 소련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소개하는 외국 사이트에는 주로 러시아 작가라고 나온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워낙 명석하고 글을 잘 썼던 아이트마토프는 소비에트 정부의 서기로 채용돼 청소년 시절을 보낸다. 문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그는 20대 중반 문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대표작 `백년보다 긴 하루는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이 줄거리다. 소설의 무대는 1980년대 카자흐스탄 사르제끄 스텝 평원. 평원에는 간이역이 있다. 기차가 가끔씩 신호대기를 위해 정차하는 아주 작은 역이다. 여름에는 사막의 열기와 모래폭풍이 겨울에는 폭설과 혹한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오지다. 역 주변에는 이런저런 상처를 간직한 사람 10여 명이 산다. 스텝에는 모든 거리가 철도로 재어진다. 그리니치 본초자오선으로부터 경도가 정해지듯…그리고 기차들은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지나간다." 어느날 간이역에서 평생을 일해 온 노인 까잔갑이 죽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동료 예지게이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전통대로 고인을 아나 베이뜨 묘지에 이슬람식으로 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지게이는 도시에서 온 노인 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신을 낙타에 싣고 아나 베이뜨로 향하는 장례 행렬을 출발시킨다. 묘지까지 가는 하루 동안 수많은 상념과 추억이 예지게이를 찾아온다.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 독재, 냉전과 산업화 등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야 했던 간이역 주민들의 인생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난다. 소설에는 징집, 포로, 반동, 처형 같은 격동의 중앙아시아 현대사를 상징하는 단어부터 사랑과 그리움 같은 낭만적인 단어들, 행성과 로켓 같은 첨단 과학 용어들이 아무 어색함 없이 버무려져 있다. 이 소설은 스텝을 닮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채 묵묵히 존재하는 스텝. 스텝은 광대하고 인간은 보잘것없다. 스텝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누가 곤란에 처했건 아니면 좋은 상태건 상관하지 않는다. 스텝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곳이다.행렬이 아나 베이뜨에 도착했지만 묘지는 철조망이 둘러쳐진 소련 우주기지로 변해 있었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아나 베이뜨가 보이는 언덕에 노인을 묻고 돌아선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흔히 말하는 `대서사시`라는 단어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았고, 알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알았다…그리고 지구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계속 돌았다."(허연 문화일보 선임기자)높이52.8㎝, 입지름 20.8㎝, 굽지름 19.1부산시는 부산박물관 소장 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13호 백자대호(白磁大壺, 2012년 5월 17일 지정)가 2020년 4월 23일자로 국가지정 문화재(보물 제 2064호)로 지정되었다고 밝혔다. 부산시 소재 보물로는 52번째다.‘백자항아리’는 1978년 2월 28일 동양고무 고 현수명 회장(1922~1977)이 기증한 유물로서 높이52.8㎝, 입지름 20.8㎝, 굽지름 19.1㎝의 대형 백자항아리이다. 현수명 회장은 1978년 부산박물관 개관 당시 서화류와 도자기류 60여점을 최초로 기증하여 부산박물관 유물 수집의 기초를 마련하게 해준 인물이다. 김영훈의 메조틴트 중세 피에타(Pieta)의 분위기와 석가여래의 표정이 엿보이는 퓨전이다. 사제 복장 같은 흑과 백의 대조가 유명(幽明)의 거리만큼이나 선명하다. 천상으로부터 올 구원의 손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있다. 긍휼함이 담긴 위로이다.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옆에서 따뜻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 그것이 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이웃을 향한뭇 갑남을녀의 자애로운 내면과 손길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몽유도원도안견의 자인 가도(可度) 인장이 분명하고 그림의 초두에 안평대군 친필 찬과 그림 말미 30~40척 종이에 김종서 등 20여 인의 발이 있는데 모두 서명 날인이 명확합니다. … (중략) … 가격은 3만원가량입니다. 내 전 재산을 경주하여서라도 이것을 손에 넣었으면 하고 침만 삼키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십 차례 보면서 단종애사를 재독하는 감상을 갖게 됩니다. 이것만은 꼭 내 손에, 아니 조선사람 손에 넣었으면 합니다."고서화 수집가였던 오봉빈(1893~미상)이 1931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에 낸 기고이다. 1931년 3월 22일 도쿄부미술관에서 `조선명화전람회`가 열렸는데 이 전시회에 현동자 안견(생몰년 미상)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전시회를 관람한 오봉빈은 '몽유도원도'가 매물로 나왔음을 알리면서 국내 수장가가 매수에 적극 나서 줄 것을 신문을 통해 호소했던 것이다. 106.5 - 38.7 cm국내에는 이 그림의 가치를 아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제시된 가격이 3만원이었다. 서울의 기왓집 30채를 살 수 있는 천문학적 거금이었다. 몽유도원도의 소유주는 오사카의 실업가 소노다 사이지(園田才治)였다. 워낙 고가여서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했다. 1933년 그림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고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도 수록됐다. 이어 1939년 일본 국보로 지정된다. 조선총독부가 나서 조선에 그림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소노다가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광복 이후에도 몽유도원도는 두 번이나 우리 품에 돌아올 뻔 했다. 그림을 상속받은 소노다의 아들 소노다 슌(園田淳)은 종전 후 궁핍해져 그림을 도쿄의 고미술상 류센도(龍泉堂)에 팔게 된다.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 관장이 1948년 12월 말 도쿄에 들렀을 때 5000달러에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국립박물관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는 금액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1949년 다량의 고서화와 불상을 해외로 밀반출한 것으로 악명 높은 골동품상 장석구가 몽유도원도를 샀다며 국내에서 그림을 들고 구매자를 찾아다녔다. 최남선, 이광수, 장택상, 전형필 등이 그림을 둘러봤다. 장석구는 1만달러를 불렀고 이번에도 몽유도원도를 살 능력이 있는 수집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장석구는 그림을 다시 일본으로 갖고 갔다. 1950년 덴리교 2대 교주인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이 이를 구입해 오늘날 덴리대 도서관에 수장했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세종 29) 안견이 그린 가로 106.5㎝, 세로 38.7㎝의 대작으로,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조선 전기의 회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걸작품이다. 오래된 작품이라 비단이 삭았지만 색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1418~1453)이 늦은 봄인 4월 20일 꿈에서 본 도원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림으로 그리게 해 안견이 사흘 만에 완성했다. 그림의 내용은 세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왼편에는 현실 세계의 일상적인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중간에는 깎아지르는 절벽과 무릉도원으로 가는 동굴 등 험난한 길이 펼쳐진다. 그리고 오른쪽에 복숭아 꽃이 만발한 이상향 무릉도원이 있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을 포함해 김종서,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의 명사 21명이 찬시를 적었다. 문화군주였던 세종의 치세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의 예술과 사상이 집결된 역사적 예술품인 것이다. 몽유도원도가 세상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29년 일본에서 발행된 `동양미술`에 논문이 발표되면서다.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라는 학자가 소노다의 그림을 보고 이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썼던 것이다. 이전에는 몽유도원도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었다. 조선 최고의 서화감식가인 오세창(1864~1953)의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근역서화징(1928년 간행)`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몽유도원도는 어떤 경로로 일본에 갔던 걸까.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93년의 일본 정부 등록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전국적인 보물감사를 실시해 등록한다. 몽유도원도도 감사를 받았다는 증서가 발급된다. 이 때 감사증 발급자는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이다. 시마즈가의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임진왜란 때 출병해 전쟁초기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철원 등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그 영역권의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대자사(大慈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대자사는 요절한 태종의 4남 성녕대군(1405~1418)의 원찰이었다. 성녕대군의 양아들로 입적된 이가 안평대군이다. 안평대군은 양아버지를 위해 절의 편액을 쓰고 문종 때에는 직접 절을 중창했다. 안평대군은 여러 귀중품을 대자사에 봉헌했을 것이고 몽유도원도도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대자사에 머물기도 했다. 가고시마현사에 수록된 시마즈 요시히로 편지의 수신지가 대자사가 적혀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대자사에 보관돼 있던 몽유도원도를 약탈해 갔던 것이다. 대자사는 임란 때 불타버렸다. 성녕대군 묘역 아래 경안군(소현세자의 3남) 묘역이 대자사터로 비정된다. 서울 인왕산 수성동 계곡과 기린교. 기린교 부근에 안평대군의 별장인 비해당(匪懈堂)이 있었다. 안평대군은 명사들을 비해당에 초청해 문학과 예술을 논했다. 몽유도원도를 감상하고 찬문을 지은 장소도 이 비해당이었을 것이다. 안평대군이 사사된 후 집도 헐렸다. 몽유도원도는 시마즈 가문 안에서도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920년대 후반 쇼와공항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고미술시장에 나왔다가 결국 소노다 사이지의 손에 들어갔다. `아 꿈이런가.`안평대군이 꿈꾸었던 이상향이 현실 세계에서 산산조각이 났듯 불세출의 국보, 몽유도원도는 우리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봄날의 꿈이었던 것이다. (배한철 매경기자)몽유도원도에 필적 15세기 산수화 日서 발견뒤늦게 조선시대 걸작으로 드러나조선 15세기 산수화 ‘방곽희추경산수도(倣郭煕秋景山水圖)’. 세로 108.1㎝, 가로 86.2㎝. /후쿠오카시미술관조선 전기 회화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에 필적할 만한 15세기 걸작 산수화가 일본에서 공개됐다. 일본 후쿠오카시미술관에서 지난 13일 개막해 10월 22일까지 열리는 ‘조선 왕조의 회화-산수·인물·화조’ 특별전에서다. 미술관은 “최근 연구가 진전돼 지금까지 중국 회화로 인식됐던 회화 중에 조선 왕조 회화가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서 “새로 발견된 작품을 포함해서 조선 왕조 회화 44점을 산수도, 인물도, 화조도로 나누어 장르별로 소개한다”고 밝혔다. 특히 전시장 입구에 첫 번째로 걸린 ‘방곽희추경산수도(倣郭煕秋景山水圖)’는 북송 최고 화가 곽희(郭熙)풍으로 그린 15세기 대형 산수화다. 세로 108.1㎝, 가로 86.2㎝. 화면 한가운데, 거대한 산이 아래서부터 위로 꿈틀거리며 솟아오른다. 산 양옆으로 안개가 끼어 있고, 오른쪽 아래엔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국내 회화사 전문가들은 “조선 전기 산수화는 워낙 남아 있는 게 드물고, 더구나 15세기로 확정할 수 있는 산수화는 국내엔 없고 일본 덴리대(天理大)가 소장한 안견의 ‘몽유도원도’ 한 점만 있었다”며 “‘몽유도원도’와 전혀 다른 양식의 15세기 조선 산수화가 일본에 있었다니 놀랍다”고 입을 모았다. 조선전기 회화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안견의〈몽유도원도〉. 현실세계와 무릉도원을 그린 네 개의 경군(景群)들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산수화로 시·서·화의 세 가지 예술이 종합적으로 구현된 작품이다. 일본 덴리대가 소장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회화사)는 “일본인 개인 소장자는 명나라 그림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타쿠라 마사아키 도쿄대 교수가 조선 15세기 회화라고 밝혔고, 작품을 실견한 한국 연구자들도 수긍하고 있다”면서 “한국 회화사를 다시 쓸 중요한 발견”이라고 말했다. 이 그림은 2016년 일본 나라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전시에 나온 적이 있지만, 워낙 작은 전시라 주목받지 못했다가 이번 전시를 통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장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전기 회화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그림”이라면서 “조선 전기 산수화에 새로운 영역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그림”이라고 했다. “국내에 남아 있는 16세기 산수화는 한쪽으로 구도가 치우친 ‘편파 구도’ 양식인데, 이 그림은 중앙 집중형으로 한가운데 산이 꽉 차 있는 곽희의 정통 산수화풍”이라는 것이다.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두루마리에 가로로 길게 그린 ‘몽유도원도’와는 또 다른 양식이고, 곽희의 대작인 ‘조춘도(早春圖·1072년)’와 상당히 흡사하다. 15세기 초 명나라 화원 화가 이재가 그린 곽희풍 산수화와도 유사하지만 그림 좌우에 있는 경물이나 인물 표현이 조선 시대적이어서 우리 그림이 맞고, 시기는 1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16세기 이후에는 산수화의 화법과 구성이 조금 더 조선화되었기 때문에 15세기로 특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장 교수는 “곽희의 ‘조춘도’ 양식을 15세기에 정통으로 계승한 그림이 중국에도 없는데, 조선에 들어와서 우리 식으로 해석이 됐다는 건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일본 후쿠오카시미술관에서 공개된 15세기 '방곽희추경산수화'부분. /후쿠오카시미술관이 그림 외에도 ‘궁녀도(宮女圖)’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등 새롭게 밝혀진 조선 회화들이 전시 중이다. 후쿠오카현 규슈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숭고한 믿음의 아름다움-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불교 미술’과 함께 관람하려는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두 전시를 연계해 다음 달 8~9일 후쿠오카시미술관에서 한일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심포지엄도 열린다. - 허윤희 조선일보 기자그리스 아토스 산(山) 수도원시모노페트라(Simonopetra) 수도원’. 해면 330m 높이의 절벽위에 지은 건축의 장대함이 압권이다. 아토스(Athos) 산 전체가 정교회의 터전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며, 수도원 이외의 다른 건물은 없다./ 그리스 ‘할키디키(Halkidiki)’ 동쪽 끝 반도 남쪽의 ‘성산(聖山·Holy Mountain)’에 세워진 수도원. 아토스(Athos) 산은 내륙에 길이 없어 수도원 대부분이 해안에 건립됐다.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에 작은 반도 세 개가 있다. ‘할키디키(Halkidiki)’라고 부른다. 그중 동쪽 끝에 있는 반도 남쪽이 ‘성산(聖山·Holy Mountain)’이다. 해발 2030m의 아토스(Athos) 산이 있고 능선을 따라 정교회 수도원들이 있다. 내륙에 길이 없어 대부분은 원남동 하수구 해안에 건립됐다. 비잔틴 제국의 후원으로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지어지다가 15세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침공으로 폐쇄·축소돼 오늘날 20개가 남아 있다. 그리스 땅이지만 출입을 위해 별도의 비자를 받아야 하는 자치 지구다. 과거 성모 마리아가 기도를 해서 얻었다는 땅으로, 성모 마리아 이외 여성은 출입이 금지돼 있다. 이에 여성들을 위해 유람선에 수도사들이 탑승, 여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해발 2030m의 아토스(Athos) 산은 과거 성모 마리아가 기도해서 얻었다는 땅으로, 성모 마리아 이외의 여성은 입산이 금지돼 있다. 그래서 유람선에 수도사들이 탑승, 여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현재 수도원 20곳에 수도사 300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그리스 정교회뿐 아니라 러시아·불가리아·루마니아·세르비아 정교회 수도원도 있다. 각 수도원은 하나의 독립된 마을처럼 구성돼 있다. 보통 예배당과 숙소, 도서관, 사무실, 양호실, 식당, 정원을 갖추고 있다. 수도원에서는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다. 올리브유나 빵, 과자, 묵주, 성화 등을 직접 만들고 간혹 시내에 내다 팔기도 한다. 재정은 기부로 충당하는데, 충분한 헌금이 들어와서 운영에 문제는 없다. 이 산 전체가 정교회 터전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다양한 형태의 수도원은 산 절벽에 성벽처럼 구축됐다. 그중에서도 330m 높이의 절벽 위에 지어진 ‘시모노페트라(Simonopetra) 수도원’의 경관이 특히 압권이다. 수도원들은 종교적 기능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졌지만 건축적 구성 또한 빼어나다. 비잔틴 양식 특유의 돔과 모자이크를 간직하고 있다. 색상이 각기 다른 굴뚝마저 조화를 이룬다.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 방식이 반영된 교회 건축의 질서와 조화가 경이롭다. - 박진배 뉴욕 FIT 교수예배당 건축 기행 유럽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교회와 성당이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종교(기독교)가 차지하는 역사적ㆍ문화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서양의 교회 건축이 왜 그렇게 다채롭고 웅장하게 발달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장엄한 종교 건축물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공간이 주는 위엄과 엄숙함에 절로 마음이 숙연해지고 고요해지는 것을 느낀다.그렇다면 우리나라 교회 건축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을까.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예배당에 들어서면 오래된 책 냄새와 장의자에서 풍겨 나오는 고풍의 향기, 해질녘까지 교회 앞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이미지가 가슴 한 구석에 아로새겨져 있는가, 아니면 주변 지역의 재개발과 함께 교회 건물 또한 크고 거대하며 제법 화려한 위용을 갖춘 현대화된 교회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가. 두 가지 이미지 모두 ‘한국교회’ 하면 떠오르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임에는 분명하다. 교회 건축과 예배당은 그 교회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비록 그 길이 빛과 그림자라는 양면을 모두 드러낸다 해도 쉼 없이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자세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건축 문화를 대표하는 건물 유형 중 하나인 교회라는 공간에 대해, 우리는 그 본령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기 이전에 독특한 외관이나 주변을 압도하는 규모만을 숭상해온 건 아닌지 이제라도 진지하게 자문해봐야 할 때다. 성당 평전성당평전|최의영·우광호 지음|시공사|436쪽성당은 감사와 갈망, 결핍이 피워낸 꽃이다. 중세 끄트머리, 르네상스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이탈리아인들은 지난 시대의 어둠을 벗어나고 싶은 갈망과 새 시대가 선사한 풍요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모두 성당에 쏟아부었다. 가톨릭 사제인 최의영 신부와 가톨릭계 언론인 우광호씨가 5년에 걸쳐 피렌체·나폴리·베네치아·바리·밀라노 등 5개 도시와 그 주변의 성당 80곳을 돌아보고 쓴 순례기는 유럽 건축과 미술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역사 속 이야기를 건넨다. 성당이 품은 가톨릭 성인들의 삶과 죽음의 사연들은 종교를 넘어 인간성의 보편적 미덕으로 확장된다.저자들이 첫손에 꼽은 건, 피렌체 대성당으로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지름 42m, 높이 136m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큐폴라(돔)를 찬미하기에 앞서 저자들은 좌절과 극복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캄비오는 당대 최고 건축가이자 예술가였다. 하지만 성당 건축 임명장을 받아들고 “내 인생 전체를 걸겠다”고 오연히 맹세한 그에게 신이 허락한 것은 고작 밑그림뿐이었다. 6년에 걸친 세심한 사전 작업을 마쳤을 뿐인데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흑사병이 온 도시를 덮쳤다. 140년에 걸친 고통과 좌절, 도전과 극복의 과정을 거쳐 우뚝 선 성당은 아름다웠다. 그 장엄미에 압도된 저자들은 신의 ‘천천히 구원하는 섭리’를 느낀다.유럽 성당들은 중세 미술의 보고(寶庫)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 소장한 마사초의 ‘성삼위일체’는 회화 역사상 단시점 원근법이 처음 적용된 걸작이다. ‘삼차원으로 감상하고 싶으면 그림에서 6m 떨어져 한쪽 눈을 감고 보라’는 두 저자의 힌트는 참으로 짓궂다. 코로나 감옥에 갇혀 중증 여행병을 앓는 독자들에게 당장 그곳에 달려가 확인하고 싶어지게 하니 말이다. 시에나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선 성당 제단화와 저자가 어릴 적 부산 범어사에서 본 탱화의 아름다움을 비교하고, 산 자카리아 성당에선 벽면을 도배지처럼 뒤덮은 15~17세기 대형 성화들 위용에 입을 벌린다.①피렌체 대성당의 큐폴라(돔) 너머로 피렌체시 전경이 펼쳐져 있다. ②135개 첨탑과 3000개 넘는 조각상을 자랑하는 밀라노 대성당. 늘 사람들로 붐빈다. ③피렌체의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있는 피에타. 미켈란젤로 만년의 작품이다. /시공사성당마다 만나는 성인의 삶은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 대성당은 로마시대 법조인과 정치인으로 성공한 삶을 살다가 세속의 모든 부와 권력을 버리고 종교에 귀의한 성인 암브로시우스가 묻힌 곳. 이교에 빠졌던 아우구스티누스를 위대한 신학자의 길로 이끌었고, 반란자 7000명을 학살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그의 품 안에서 참회하며 생을 마치게 했다. 나폴리 대성당에선 4세기에 순교한 젠나로 성인의 피가 1년에 두 번 액체 상태로 돌아온다는 기이한 이야기도 듣는다.베네치아는 옥토를 빼앗기고 쫓겨온 사람들이 만든 도시다. 갯벌 위에 지은 가난한 도시가 해상무역 시대를 맞아 크게 번영했다. 그 거대한 반전을 목격한 이들이 산 마르코 대성당과 산 조르조 마조레 대성당을 지어 신에게 바쳤다. 그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깃들었을까. 저자들이 찾아간 산 조르조 대성당엔 틴토레토의 걸작 ‘최후의 만찬’이 소장돼 있다. 그림 속 예수는 어둡고 누추한 방에서 직접 빵을 들고 다니며 제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 날 저녁을 보냈다. 사치를 경계하고 남을 섬기는 삶을 잊지 않으려 했던 베네치아인들의 마음을 읽는다.밀라노는 명품 성당의 향연이 펼쳐지는 도시다. 1386년 첫 삽을 뜬 밀라노 대성당은 1965년에야 정면 출입문을 완성했다. 600년 동안 135개의 첨탑과 3000개 넘는 조각상을 만들어 성당을 장식했다. 무엇이 이토록 오래 식지 않는 열정을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을까. 두 저자는 성당 앞에서 티끌처럼 작아지는 자신들을 느낀다면서도 인간은 ‘생각하는 먼지’라고 했다. 이 모든 아름다움과 거룩함, 숭고함이 그 티끌의 염원으로 이룩됐다.책 곳곳에 성당 사진들을 풍성하게 펼쳐 놓았다. 여행에 목마른 이들에게도 훌륭한 위로가 될 듯하다. (김태훈 조선일보 출판전문기자) 강한수 저 - 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사진가가 찾은 한국의 아름다운 성당 50선‘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 사제 되기전 세상 알고 싶어서울대 건축 전공후 현장일성당은 지상 위 천상의 궁전빛을 성당안에 끌어들이는아치형 중세 로마네스크양식국내엔 성공회성당·전동성당 비가시적인 종교적 가치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실재 중의 하나가 건축입니다. 강한수 민락동성당 주임신부(59·의정부교구 건축신학 연구소장·사진)는 건축을 전공한 사제다. 그는 서른 살의 나이로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 현장에서 일한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사제생활을 하다 안식년을 맞아 로마 사피엔자대에서 고대 및 중세 건축사를 공부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건축을 공부하다 사제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사제의 길을 걷기 위한 준비로 건축 공부를 선택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대학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제로 산다는 것은 세상 밖이 아닌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느님에 관한 공부를 하기 전에, 세상 것을 공부하고 세상을 알고 싶었습니다."강 신부는 최근 '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파람북)을 펴냈다. 로마네스크 성당 건축에 대한 안내서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 크게 유행한 건축양식이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몽생미셸 수도원, 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 피사의 성모승천 대성당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찾기 어려운데 덕수궁 옆 서울 성공회 대성당, 전주에 있는 전동성당 등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유명한 명동대성당은 고딕양식이다. 중세 무렵 로마의 건축 양식을 교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 로마네스크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고유한 성당의 형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로마네스크 양식입니다. 건축을 공부했던 사제가 로마네스크 양식에 관심 갖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요?"로마네스크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두꺼운 벽체와 기둥이다. 빛을 성당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도입된 '아치 구조'역시 로마네스크의 특징이다. 이 때문에 로마네스크 성당에 들어서면 고요와 신비가 느껴진다. 두꺼운 벽체와 작은 창문, 그리고 아치 구조는 사실 성당을 더 크고 높게 지으려는 노력의 결과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세상을 의미하는 수평 위에 신을 향한 수직성을 표현하는 양식이다. 가톨릭에서 건축이 상징하는 의미를 묻자 강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성당은 세상의 물질로 만들어졌으나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이에요. 성당은 지상에 있는 천상의 궁전이고, 돌과 흙으로 만들어져 언젠가는 무너지겠지만 빛이신 그리스도를 담는 공간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입는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한국에는 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 많지 않냐는 질문에 강 신부는 흥미로운 설명을 들려줬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000여 년 전에 시작되어 고딕 양식이 생겨나기 전까지 약 200년 동안 유럽의 성당 형태를 이끌었어요.. 하지만 한국에 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입니다. 그사이 수많은 건축 양식이 등장했고, 건축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 사회, 문화, 구조역학, 건축재료 등이 변화했어요. 현대에 도입되기 시작한 한국 교회 건축에 1000여 년 전의 양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앞으로 많은 건축가들이 로마네스크 성당을 연구하고 재해석한다면 빛이 머무는 로마네스크 성당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전의 것을 부활시켜 지금의 언어로 현대인들에게 말을 걸게 하는 것이 성당 건축가의 몫입니다."강 신부는 사제품을 받을 때 성품성구로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야서 6장 8절)를 선택했다. 이 성구는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족하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언제나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것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 허연 매경 문화선임기자구원과 영성이 깃든 공간경기 화성시에 있는 남양성모성지에 볼 일이 있어 다녀왔다. 지금 이곳은 한국 건축 역사에서 가장 크고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쓰이고 있는 곳이다.적벽돌로 구축한 견고한 건물로 그 안에 들어가 생활하는 인간에게 깊은 평화와 안전을 느끼게 하는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약 8년 만에 위용 넘치는 대성당을 완공했고, 지금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이자 ‘건축가들의 건축가’로 불리는 페터 춤토르가 티(tea) 채플을 설계하고 있는 덕분이다. 스위스 산골 마을 할덴슈타인에 거주하며 은둔의 철학자처럼 작업하는 그가 지은 건물은 전 세계를 통틀어 채 10개 정도밖에 안 되지만 모두가 아름답고 감동적인 오라와 분위기로 유명하다. 티 채플이 계획대로 완공된다면 이 건물은 그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프로젝트가 된다.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상각 신부의 이름에도 관심과 호기심이 닿게 된다. 보통 5년에 한 번씩 이동하는 관례와 달리 사제품을 받고 35년간 남양에서만 사제 생활을 한 그는 이 땅을 일구고 단장하면서 세계적 건축물을 짓기로 결심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야심과 포부도 어쩌면 오래전 패러다임. 안온한 하루에 방점을 찍는 시대에 나의 할 일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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